은채니(박은빈)는 순간이동을 하려다가 엉뚱한 화장실에 도착합니다. 의지로 컨트롤이 되지 않는 초능력이라 원하는 장소로 가는 건 사실상 불가능합니다. 1999년 해성시, 밀레니엄 버그 공포와 종말론이 뒤섞이던 시대에 이런 초능력자가 됐다는 것이 이 드라마의 출발점입니다.
2026년 5월 15일 넷플릭스에 전 8부작이 한꺼번에 공개된 <원더풀스>는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의 유인식 감독 신작입니다. 스탠 리가 기획과 개발에 참여한 K히어로물이기도 합니다. 공개 직후 25개국 TOP 10에 올랐고, 로튼토마토 비평가 점수는 100%, 관객 점수는 97%입니다. 직접 시청한 뒤 무엇이 이 드라마를 특별하게 만들었는지, 그리고 어디서 한계가 보였는지를 솔직하게 정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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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세기말이라는 배경이 왜 탁월한가
밀레니엄 버그(Y2K)가 세상을 멈춰버릴 거라는 공포, 각종 종말론이 뉴스를 채우던 1999년은 초능력이라는 소재와 기묘하게 잘 맞습니다. 이미 세상이 망할 것 같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는 시대라면, 동네 허당들이 초능력을 얻었다는 사실이 그나마 받아들여질 수 있습니다.
더 중요한 건 이 배경이 자연스럽게 코미디를 만들어낸다는 점입니다. 인터넷도, 스마트폰도 없던 시절이라 초능력자가 됐다는 사실이 빠르게 퍼지지 않습니다. 민원실 공무원 이운정(차은우)이 서류를 염력으로 움직인다는 걸 아는 사람이 없습니다. 채니가 순간이동에 실패해 엉뚱한 곳에 나타나도 스마트폰 영상 증거가 없습니다. 이 아날로그적 격리감이 코미디와 어드벤처 양쪽에 유리하게 작동합니다.
1990년대 한국의 소품과 의상, 말투가 재현되는 방식도 어린 시절이 그 시대인 시청자에게는 반가움 한 겹을 더해줍니다. 세기말 팝음악이 흘러나오고, 삐삐가 등장하고, PC방 문화가 배경으로 깔립니다. 향수를 자극하면서 코미디의 밀도를 높이는 설정입니다. 히어로물이 지금 이 시대가 아닌 과거를 배경으로 선택했을 때 얻는 이점을 이 드라마는 최대한 활용합니다.
박은빈의 채니와 차은우의 이운정 — 두 초능력의 대비가 케미를 만든다
채니의 순간이동과 이운정의 염력은 사실 정반대의 성격입니다. 채니의 능력은 의지로 통제되지 않아서 언제, 어디로 튈지 알 수 없습니다. 이운정의 능력은 오랫동안 감춰온 것으로, 원칙주의자인 그가 스스로 드러내지 않으려고 철저히 관리해온 능력입니다. 두 캐릭터의 초능력이 가진 성격 차이가 그대로 케미의 원천이 됩니다. 채니는 통제 불가능하고, 이운정은 과도하게 통제적입니다. 이 조합이 교류를 만들고, 교류가 이야기를 끌고 갑니다.
박은빈은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이후 다시 유인식 감독을 선택한 만큼 인물을 다루는 방식에서 신뢰가 느껴집니다. 채니의 실수투성이 순간이동 장면들은 코미디와 감정 사이를 정확히 오갑니다. 웃기다가 갑자기 애잔해지는 타이밍이 있는데, 그 전환이 어색하지 않습니다. 씨네21이 "다이나믹하고 매력적"이라고 표현한 지점이 바로 이 부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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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은우는 첫 작품들과는 결이 다른 연기를 보여줍니다. 원칙에 집착하는 딱딱한 공무원이라는 캐릭터 출발점을 설정하고, 채니와 얽히면서 조금씩 균열이 가는 모습을 설득력 있게 연기합니다. 염력을 드러내는 장면들에서는 오랫동안 감춰온 것을 내보이는 사람 특유의 망설임이 느껴집니다. 손현주, 최대훈, 김해숙 등 베테랑 배우들이 받쳐주는 구조도 드라마 전체의 무게 중심을 잡아줍니다.
유인식 감독의 색감 문법 — 선한 인물은 밝게, 악인은 어둡게
유인식 감독의 가장 눈에 띄는 연출 선택은 빛의 온도입니다. 채니와 이운정 같은 선한 인물들이 등장하는 장면은 자연광이 많이 드는 밝고 따뜻한 색감으로 처리됩니다. 빌런 쪽 장면은 채도가 낮고 어두운 색 구성을 씁니다. 이 규칙이 일관되게 유지되기 때문에, 장면이 전환될 때마다 시청자는 자연스럽게 어느 편의 시점인지를 구별하게 됩니다.
액션 장면은 실용 효과와 CGI를 혼합하는 방식을 선택했습니다. 슈퍼히어로물이지만 마블 스타일의 대규모 CGI 전투보다는 초능력이 일상과 맞닿는 순간을 포착하는 방식으로 접근합니다. 채니의 순간이동이 실패하는 장면, 이운정이 서류를 살짝 움직이는 장면처럼 일상적 스케일의 초능력 묘사가 오히려 더 웃기고 친근합니다. 스탠 리가 기획에 참여한 드라마답게, 결함 있는 히어로라는 마블의 공식을 한국 정서로 번안한 결과물이 느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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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튼토마토 100%와 25개국 TOP 10 — 해외에서 왜 통했나
비평가 100%는 단순히 혹평이 없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IMDb 7.8에 로튼토마토 관객 점수 97%는 드라마가 약속한 장르적 기대를 충족시켰다는 신호입니다. 히어로물을 기대한 시청자는 히어로 액션을 봤고, 코미디를 기대한 시청자는 충분히 웃을 수 있었습니다. 장르 혼합이 실패하지 않았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25개국 TOP 10 진입은 K드라마 글로벌 성과 중에서도 상위권입니다. 영미권 매체 리뷰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한 단어는 "charming(매력적)"과 "fun(재미있다)"이었습니다. 특히 히어로물 레퍼런스가 풍부한 영어권 국가에서 1999년이라는 이국적 배경과 코미디 톤이 오히려 신선함으로 작용한 것으로 보입니다. 미국 매체 Collider는 "Netflix가 마침내 히어로 장르에서 제대로 된 K드라마를 내놨다"고 평했습니다.
비판이 없는 건 아닙니다. 결말 처리에서 감정적 여운이 약하다는 평, 일부 코믹 장면의 호흡이 너무 길다는 지적이 있습니다. 이운정의 신체 상태를 둘러싼 복선이 충분히 해소되지 않았다는 피드백도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도 마지막 화가 앞의 에피소드들이 쌓은 감정선을 다 쓰지 못하고 닫는다는 느낌이 있었습니다.
볼 사람과 안 맞을 사람 — 취향 기준으로 나눈다
이런 분에게 추천합니다: 코미디와 히어로 액션을 동시에 원하는 분,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를 재미있게 봤고 유인식 감독의 다음 작품이 궁금한 분, 박은빈의 코믹한 면모를 더 보고 싶은 분. 8부작 전회차 공개라 정주행 부담이 적고, 진지하게 분석하기보다 즐기면서 보는 드라마입니다. 1990년대 한국 문화에 향수를 느끼는 분이라면 배경 재현만으로도 볼 이유가 생깁니다.
이런 분에게는 맞지 않을 수 있습니다: 히어로물에서 강렬한 서사와 무게감을 기대하는 분, <무빙>이나 마블 영화 수준의 액션 스케일을 원하는 분, 결말이 명쾌하게 닫혀야 하는 분. 코미디 톤이 끝까지 유지되기 때문에 히어로 장르의 진지함을 원하는 시청자에게는 가볍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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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더풀스>는 K드라마가 히어로 장르를 어떻게 자기 방식으로 소화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스탠 리의 참여와 글로벌 성과가 증명하듯, 슈퍼히어로 공식을 수입하는 대신 1999년 해성시라는 구체적인 장소와 시간 속에서 한국형 히어로를 만들어냈습니다.
RT 100%나 25개국 TOP 10보다 중요한 건 박은빈의 채니가 또 엉뚱한 곳에 순간이동하는 장면에서 실제로 웃음이 나온다는 점입니다. 그 웃음이 나온다면 8부작을 끝까지 볼 이유가 충분합니다.